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네스트 리베라티 (문단 편집) === 선수 생활 === 지금의 [[알제리]]에 속한 [[오랑]]지방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빼면 리베라티의 어린 시절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. 1929년 무렵에 아미앵 AC에 합류하였고 두 차례의 [[쿠프 드 프랑스]] 준결승에서 이름을 알렸다. 비록 2차전에서 3골을 얻어맞고 결승 무대에 서기에는 실패하였지만 리베라티는 1차전에서 동점골을 넣는 활약을 했다. 그리고 당시 프랑스 북부지방에서 잘 나가던 아미앵 AC은 1932년 프로화가 될 때 시대에 뒤처지는 선택을 했다. 즉, 아마추어로 남은 것. 하지만 리베라티는 프로화가 된 팀에서 뛰기를 원했고 그의 선택은 SC 피브로의 이적이었다. 리베라티는 SC 피브에서 팀 내 최다득점 2위에 오르는 등 SC 피브의 중심 선수로 활약했다. 하지만 1934년 이후로 그의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팀 내 득점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. 1935년에 다시 피브에서 쿠프 드 프랑스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거기까지였다. 아미앵에서만큼 팀 성적과 개인 성적이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자 리베라티는 다시 이적을 결심하였다. 새로운 팀 [[FC 소쇼-몽벨리아르|소쇼]]에서 그는 [[로제 쿠르투아]], [[앙드레 아베글렁]] 등과 좋은 호흡을 맞춰줄 것으로 기대하였다.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발목을 잡혔다. 그 부상 때문에 6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쿠프 드 프랑스 4강전에 출전할 기회를 잡았다. 상대는 RC 프랑스로 1929년 시즌에 아미앵 AC를 탈락시켰던 그 팀이었다. 리베라티는 복수를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. 시즌을 마친 리베라티는 팀을 떠났고 2부 리그 팀이었던 발랑시엔으로 이적하였다. 발랑시엔에서는 25경기에 출전, 18골을 넣는 활약을 하였다. 그리고 이것이 리베라티의 마지막 불꽃이었다.[* 영문 위키 등에는 1938년 시즌에 리베라티가 [[올랭피크 마르세유]]에서 뛰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골키퍼 앙드레 리베라티와 혼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